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복음이 이 땅의 작은 마을에 씨앗을 뿌렸고, 작은 불길은 큰 불을 일으켜 한국 교회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
왔다. 복음의 도도한 물결은 아름답게 꽃피고 열매를 맺어 마침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크고 많은 교회가
탄생되었다.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제이교회의 역사를 이 시점에서 회고하고 그 발자취를 살펴보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숨을 고르는 의미가 될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 달남(達南)교회의 창립
1912년 분립된 서편교회(일명 동신교회)초기모습
(달남교회또는 서문밖교회라 불렸으며 지금 제이교회전신이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대부흥 운동은 전국 각지의 부흥운동과 회개 운동으로 교세가 확장되었고, 1912년 장로교
통계에 따르면 목사 128명, 장로225명, 세례교인 총수 53,008명으로 그 위세가 발전하였다.
1900년 이후 대구 읍 교회(현 제일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여 대구 읍내에 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멀리 경산, 칠곡, 가창 등
동서남북에서 교인들이 출석하여 대구 읍 교회는 분립 하기에 이른다.
1912년 설립된 달남(達南)교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2년 대구 읍 교회 당회록에 의하면 본 교회 교인이 왕성하고 교회당이 협착하므로 본 지방 서편 신동 등지에 3백명되는 교회
한 곳을 세워 선교사회에 맡겨 처리하기로 동의 가결하다.
1912년 경상노회록에 의하면 홍승한씨가 대구 읍 교회에서 서편 전동, 후동, 신동 달성 등지에 삼백여명이 되는 교회 당갈음을
보고하매 회중이 보고대로 갈음하여 허락주기로 동의 가결 한다. 대구 서편에도 딴 당회를 허락하기로 회중이 동의 가결하다. 신정교회
창립 25주년 연혁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주후 일천 팔백 십사 년 원두우선교사가 복음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하야 안의와 목사가 부산으로부터 일천 팔백 구십 오년 십
이월에 대구 남문 안에 주소를 정하고 전도를 시작하야 대구에 교회를 세운지 십 오년만에 교세가 왕성함으로 대구서부에 교회를
설립함이 합당하야 일천 구백 십이 년 오월 이십 일에 세례교인 사십 명과 원입교인 오십 명이 남셩뎡 교회로써 교회를 분립하니
신정교회의 창립이로다.
한편, 초창기 대구지역 선교사로 봉사한 H.M.Bruen(부해리)선교사의 자료집<한국에서 40년>에 의하면 대구제이교회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The Second Church(Su Pyun or Su Moon, which means West Gate) was
founded on May 20,1912. Mr.Bruen was the moderator of the session
and Dr. Fletcher was in charge of the church. Chang Chair Soon was
the first pastor.
- 서편 또는 서문이란 뜻을 가진 대구제이교회는 1912년 5월 20일에 창립되었다. Bruen 은 당회장이었고,
Fletcher는 담당자이었으며 정재순은 첫 번째 목사이다. -
서편교회 초창기는 달남, 서편, 서문이란 이름을 사용하였고, 일제시대는 신정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부 교인들은
1912년에서 1913년 기간 중 동산병원 대기실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을 때에는 동산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달남교회 또는 서편교회 그리고 동산교회라 불리던 교회 명칭이 일제시대에는 신정(신정)교회라 불렀고, 1947년 신정교회에서
서문(西門)교회라 개칭하였다.
1959년 장로교단의 분열로 인하여 서문교회는 1961년 분립되어 제이교회(통합)와 서문교회(합동)으로 나누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 - 예배당의 신축
1928년 예배당 봉헌 기념식 사진(1928년)
1912년 설립된 신정교회는 예배당이 없어 90여명의 교인이 모여서 처음에는 제중원 남녀 대합실을 빌려서 7개월간 집회하는 중
교인수가 150여명이 되었고, 1912년 11월에 계성학교 기도실을 빌려서 8개월을 경과하니 교인수가 200명으로
급성장하였다.
최초의 예배당 신축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13년 3월 20일에 신정 810번지에 예배당을 건축하니 건평 50여 평에 목제함석집 20 간이오 기지 300평은 미순회
기부를 받고 건축비 1,050전으로 준공하야 8월에 헌당식을 거행하니 이 성전이 신정교회 최초의 예배당이다.
1913년 첫 번째 성전에 이어 1928년 두 번째 성전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22년 4월 2일 예배당 신축기성회를 조직하니 회장 리경욱, 서기 김태술, 회계 정경로, 진기찬, 리명긔, 감사 김영서,
리상진, 졍상호 연보한 회원이 232인이며 작정한 금액이 2,692원 90전이더라 . 1926년 7월 12일부터 본 예배당을
신축키 위하여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고 동년 9월 9일에 목사 사택은 횡뎡으로 이사하고 예배는 보기로 하고 구 건물을 헐어 버리고
공사를 시작, 1928년 5월 6일 두 번째 성전인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세 번째 이야기 - 초창기 교역자와 전도 활동
대구 초창기 목회자
(좌로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목사)
1920년 6월 신정교회 교회학교 학생일동
(두번째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정오장로)
1920년대 대구지역 사경회(부흥회) 광경
1912년 설립된 신정교회는 예배당이 없어 90여명의 교인이 모여서 처음에는 제중원 남녀 대합실을 빌려서 7개월간 집회하는 중
교인수가 150여명이 되었고, 1912년 11월에 계성학교 기도실을 빌려서 8개월을 경과하니 교인수가 200명으로
급성장하였다.
최초의 예배당 신축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13년 3월 20일에 신정 810번지에 예배당을 건축하니 건평 50여 평에 목제함석집 20 간이오 기지 300평은 미순회
기부를 받고 건축비 1,050전으로 준공하야 8월에 헌당식을 거행하니 이 성전이 신정교회 최초의 예배당이다.
1913년 첫 번째 성전에 이어 1928년 두 번째 성전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22년 4월 2일 예배당 신축기성회를 조직하니 회장 리경욱, 서기 김태술, 회계 정경로, 진기찬, 리명긔, 감사 김영서,
리상진, 졍상호 연보한 회원이 232인이며 작정한 금액이 2,692원 90전이더라. 1926년 7월 12일부터 본 예배당을 신축키
위하여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고 동년 9월 9일에 목사 사택은 횡뎡으로 이사하고 예배는 보기로 하고 구 건물을 헐어 버리고 공사를
시작, 1928년 5월 6일 두 번째 성전인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네 번째 이야기 - 교회의 안정기(1945~1960)
10년 이상 봉직자 표창 기념
해방과 6.25 전쟁
1945년 9월 20일 , 신사참배의 강요를 반대해 투옥된 70여 교역자 중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50여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나머지 20여명은 출옥하여 평양 산정현 교회에 모였다 . 이들은 한국교회 재건에 관하여 밀도
있게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한국교회 재건 5대 기본원칙을 발표하게 되었다.
(1)교회의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참회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2)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자복할 것
(3)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국 각 노회 또는 지 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5)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 할 것
1947년 4월 제2회 남부총회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의 특기할 점은 1942년 일제 강압으로 해체되었던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31회 총회를 계승하여 제33회 총회로 개최할 것을 결정한 사실이다.
경북노회는 1942년 제41회 노회부터 3년간 해체되었으나 8.15 해방으로 1945년 11월 6일 제일교회에서 제42회
노회를 열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리 교회는 8.15 해방을 맞이하여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주님이란 신앙고백을 통하여
지난 일제강점의 신사참배에 대하여 참회 예배를 드렸다
主後 一九四六年 九月 八日 오전 十시반 례배
하나임께셔 人生의 계명을 나려실제 하나임 박케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라고 하셧는데 일본정부의 위력으로 신이
아니라는 신사에 참배하는 국가의식이라고 강요함에 다슈교인이 참가됨을 씻기 어려운 점임이다. 中心으로 회개하여
굳은 결심으로 새출발을 하옵셰다. 순교 당한 이들에게 감샤를 돌리여 여생을 독신으로 보응하옵셰다
정재순 목사가 사임함에 따라 1946년 명신홍 목사가 신정교회로 부임했다.
명신홍 목사는 1946년 7월 24일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8.15해방과 6.26 전쟁 등 한국 격동기에 11년간 시무하면서
교회창립 40주년 행사 등 교회를 안정시킨 목회자이다.
1947년 일제시대에 신정(新町)교회라 불려진 교회 명칭을 서문(西問)교회로 고쳐 불렀고, 동년 2월 17일 부흥회(강사
한병혁목사)를 개최하여 특별 헌금하였으며, 45만 여원으로 종을 헌납, 1948년 10월 28일부터 교회 종소리를 듣게
되었다.
1948년 10월 17일, 유치원을 새로 개원하였고 1950년 6월 25일 중등부를 조직하였으며, 1952년 교회창립
4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6.25 전쟁과 우리 교회
1950년 6월 25일 이날은 주일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처참하였다.
여순(麗水,順天)반란 때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용서해 주었던 성인 손양원(孫良源)목사와 부흥목사 김익두의 순교,
구세군 노영수, 감리교의 송정근, 1930년대 농촌사업의 기수였던 조민형과 신석구, 장로교의 박경구, 정일선의 순교,
그리고 남궁혁, 양주삼, 송창근, 박현명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6.25 전쟁으로 파손, 손실된 교회 수는 남한에서만 장로교가 541교회, 감리교 239교회, 성결교 106교회, 구세군
4영문, 기타 교파에서도 그 손해는 막심하였다. 순교, 납치당한 교역자는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성공회 6명 등이었다.
대구 동산병원은 1953년 10월 선명회 피어스(Robert Pierce)박사의 5만달러 기부와 유엔
한국재건원조처(UNKRA)와 주한미군 대한원조처(AFAK)의 원조를 받아 전 면적 306평 60병상의 3층 건물인
아동병원을 설립하여 대구 근교 30여개 고아원에 수용중인 아이들을 전원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나아와 창립 4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씻고 안정을 찾았다.
창립 40주년 기념 성가대 일동(1952년)
창립 40주년
창립 40주년 당시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 기 념 사 -
목사 명 신 홍
一九一二年에 창립한 후로 우리 서문교회는 이제 四十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경을 통하야 보면 四十이란 완전수 또는
성수(聖數)임을 알수 있는이 만큼 과연 우리 교회의 四十주년은 특히 기념할만한 해가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과거를 살펴 볼때에 풍우한서 파란곡절을 겪은바 없지도 않지만은 일반적으로 평하면 비교적 순조로히
성장하며 진보한 것이다. 남셩정교회로부터 분립하는 초년에는 동산병원의 대합실을 빌려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더니
七개월후인 一九十三년에 건평 五十평의 예배당을 신축하고 一九一七년에는 다시 二十평을 증축하고 一九二六년에는 달성공원
동남에 아담스럽게도 반 공중에 웃뚝 솟은 종각을 신축하였다. 一九一九년에 목사관을 건축하고 금년도에는 四十주년
기념관을 아름답게 한양식 二층으로 건축하게 되었다.
창립 초에는 약 백명의 교우를 산하게 되더니 과거 四十년 간에 이현, 대신, 달서 여러교회를 분립하고도 금일에
五六九호 장년 一六四○명 유년 一四○○명 합 三○四○명의 교우를 가젓을 뿐아니라 그 안에는 당회 제직회 외에 상당히
충실한 장, 유년주일학교 남녀전도회 소년부, 학생부, 청년부 등을 각각 포함한 면려회, 유년, 소년, 학생, 청년
등의 각 성가대와 百여명의 원아들을 기르는 유치원 三백여명의 소년을 양육하는 공민학교 등을 소유한 대구 서문교회를
일우게 된 것이다.
이는 곧 四十년 간에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룰 주신 증거이니 우리는 이를
기렴하고 또한 감사 찬송 하는 바이다.
그리고 인간면으로 보면 수많은 주의 종들이 四十년간 주야로 기도하고 물심쌍면으로 주를 섬기며 합심 합력 교회를 받든
결과 인즉 우리는 또한 감사함으로 저들의 공적을 기념하노라
우리에게 엇지 인간적인 약점이 없으리요만은 우리 서문교회는 비교적 건전성을 소유한 사실을 과거 四十년간 역사가
넉넉히 보여 주고 있다. 신학적으로는 신신학파에 대하야 건전한 성서신앙을 직혔고 정치적으로는 자유파나 고려파에
대하야 건전한 전통을 힘차게 직혀왔다. 그리고 인사면으로 보면 교역자의 이동이 비교적 적어서 과거 四十년이 염봉남
목사의 시무 十五년과 정재순 목사의 시무 十六년으로 그 대부분을 덮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금일에
저들이 뵈여준 그 건전성을 기념하고 찬하하는 바이다.
四十년의 광야 생활을 피하고 요단강을 건는 이스라엘 민중은 오히려 더 큰 과업을 당면하게 되었던 것과도 같이 과거
四十년을 주의 축복아래 통과한 서문교회는 이제 앞의 一층 더 과대한 과업을 위하야 배나 더 주의 은혜를 받고
분투하며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四十주년을 당한 금일에 과거를 기념하야 감사하고 찬송하려니와 미래를 바라 볼 때에
간곡한 기도와 아울러 심중한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할 것이요 거리고 다시 진심 갈역하야 그 결심을 실천에 옴김으로
이제부터 十년 二十년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더욱 더욱 전진 전진 함으로 주의 뜻을 일우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여야 할
것이다
주여! 그대로 일우어 주시 옵소서 아-멘
서문교회 하기학교 교직원(1958년)
-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예배 - (1952.12.14)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예배
이표는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예배 테이블입니다
사회
명신홍 목사
묵도 송영(기립)
묵도 송영(기립)
이표는 묵도 송영(기립) 테이블입니다
기도
사회자
찬송 32장
다 같이
시편교독 23편
다 같이
기도
이경욱 장노
상경봉독
마 十六 13-20 사회자
주일헌금
당번집사
기도
사회자
광고
김정오 장노
찬양
성가대
기렴사
김정오 장노
十년이상 근속 교직자 표창
十년이상 근속 교직자 표창
이표는 十년이상 근속 교직자 표창 테이블입니다
축사
박형용 목사
찬송 3장
다 같이
축도
명신홍 목사
송영
성가대
폐회
다섯 번째 이야기 - 교회의 분란과 새 출발
서문교회 학생회 추수감사절 발표회
(신명여고 강당, 1963. 11. 10)
1장 : 짚어야 할 사건들
이성헌 목사의 부임
이성헌 목사는 1957년 3월 명신홍 목사가 사면하고 서문교회 위임목사로 헌신하신 분이다
이성헌 목사는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약 3년간 서문교회에 시무하면서 1958년 2월 2일 면려회를 장년,
청년, 고등, 소년 4부로 개편하였고, 동년 3월 2일 교회 묘지규칙을 제정하였으며, 1960년 6월 16일
서문시장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피해 입은 교인을 위하여 특별헌금을 하여 구제활동을 하는 등 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1960년 장로교단이 분열될 때 까지 서문교회 담임목사로 봉사하였다.
여름성경학교(1963년)
장로교의 분열
1930년대에 와서 장로교 분열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원인은 지방적 원인과 신학적인 것 두 가지였다.
1934년 조선 교회 역사 50년의 희년(禧年)을 맞이하여 교세가 525,200명으로 발전하였으나 같은 해 장로회
총회는 남부지방에서 온 총대들을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고, 남부 노회들에서는 북부가 전제(專制)하고 있는 이상 그
총회에서 이탈하겠다고 위협하였다.
한편, 일본이나 구미에서 신학을 연구한 한국인 목사가 귀국하고 세계 신학의 흐름을 소개하면서부터 한국 교회는
진취적인 신학의 기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고려파(高麗派)의 분열
고려파의 분열은 경남지방에서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로 오염된 교회를 정화한다는 명분에서 일어나 확고한
정통주의 신학교 설립을 주장하며 1946년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고려신학교가 출범하면서
비롯되었다.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와 본 총회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고신측은 총회에서 완전 이탈하였다.
합동파(合同派)의 분열
장로교는 고려파와 기장파가 이탈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으나 1959년 최대의 분열을 맞이하는데
그 원인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찬반에서 비롯된다.
당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용공적이다 신신학이다 공격하던 일부 목회자들은 한국 교회의 순수성
보존의 기치아래 세계교회협의회(WCC) 탈퇴를 주장하였다.
즉,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칼(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하는 쪽은 통합측, 반대하는 쪽은
합동측이라 부르며 각자의 신학 노선을 주장하여 또 다시 분열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서문교회는 고려파와 기장파가 분열될 때까지 흔들림 없이 교회가 이어져 왔으나,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칼(교회일치운동)의 여파에 휩싸여 장기간 분쟁을 거듭하였다.
제2교회 투시도(1966년)
성전기공예배(1966. 4 .5)
2장 : 대구 제이 교회의 새 출발
1959년 대한예수교 장로교의 분열에 이어 경북노회도 교단분열에 따라서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으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서문교회는 장로교 분열이라는 교회 밖의 역사적 전환점에서 당회장을 비롯한 다수 교인은 예수교 장로교 합동인
서문교회에 잔류하고, 에큐메니칼을 주장하는 일부 교인은 교회에서 쫓겨나 혹독한 시련 끝에 대한 예수교 장로교
제이교회로 거듭났다.
1961년 1월 상호 협의하여 분립한 제이교회는 신명여고와 성경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 교회 명칭은
양교회가 서문교회라 부르다가 1966년 9월 4일 공동의회에서 대구에서 두 번 째 교회라는 의미에서
「大邱第二敎會」라 칭하였다고 한다.
1966년 1월 2일 김창진 목사가 부임하고 같은 해 2월 4일 교회분규해결교섭위원으로 김정오, 문영복, 편무조,
이중화, 김보은 이상 5명을 선정하였으나 원만한 합의를 보지 못하여 법정으로 비화되었다.
동년, 교회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교회부지 400평을 1,400,00원으로 매입하였으며 4 월 5일 교회건축
기공예배를 드리면서 제이교회는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여섯 번째 이야기 - 헌당식과 교회의 부흥
성전 준공(1975년)
제1장 : 헌당식과 임직식
제1절 헌당식
교회는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건축을 시작 하였다.
건축위원장 이규필 장로의 제직회 보고에 의하면 계약자가 직접 공사를 하지 않고 청부를 주어 공사가 지연되기도
하였고, 임시 예배장소로 신명여고 강당을 사용하였으나 강당수리를 하게 되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많은 교우들의 활동 중 부인부(현 여전도회)위원들의 활동이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사회적으로 경제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여 고난이 컸고 많은 장벽이 있었으나 김창진 목사와 교인들의 합심 노력으로 1975년 교회 헌당식을 갖게
되었다.
1970년경 성전 건축중
성전 봉헌예배
성전 봉헌예배
이표는 성전 봉헌예배 테이블입니다
일시
1975년 5월 21일
집례
당회장 김창진 목사
기 도
증경 건축위원장 문영복 장로
성경봉독
마 16 : 13-20 당 회 장
주일헌금 기도
김상열 장로
설 교
반석위에 세운 교회 당회장 김창진목사
찬 송
541장 다 함 께
헌당기원
대하 6:18-20 집례 목사
경과보고
초대 건축위원장 김정오 장로
헌건(당회장에게)
건축위원장 이규필 장로
위원장
내가 건축위원회를 대표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대구제2교회 당회장 김창진목사님에게
이제는 성전 건축 공사를 마치고 이 열쇠를 드립니다
당회장
내가 이 열쇠를 받아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며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에만 쓰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영원토록 있으리로다
-아멘-
감사패 증정
감사패 증정
이표는 감사패 증정 테이블입니다
마포화열(동산기독병원장 및
영부인에게)
신태식(계명대학장에게)
김창진 목사에게
내빈축사
마포화열 원장
인사 및 광고
건축 부위원장 김보은 장로
찬 양
할렐루야 성가대
기도
사회자
광고
김정오 장노
찬양
성가대
기렴사
김정오 장노
☆교회 약사☆
본 대구 제2교회는 1895년 12월에 미국 선교사 안의와 목사가 대구에 전도를 시작하여 현 대구 제일교회를
설립하였던 바 지역관계로 1910년 봄부터 동산 신명학교 옛 기숙사를 기도실로 정하여 2년간 지나다가 다시
1912년 5월 21일에 세례교인 40명, 학습교인 50명이 교회를 분립하여 달남교회라 이름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제2교회의 시작이다.
그간 본 교회는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많은 지교회를 분립했으며, 현재는 위임목사에 김창진 목사, 장로 12명, 권사
10명, 장립집사 7명, 서리집사 90명, 세례교인 425명이다.
☆건축 경과보고☆
- 1966. 1. 2 건축위원회 조직
- 1966. 4. 5 기공식 예배 (남산동 1번지에 대지 600평을 구입하여 2층 연건평 540평)
- 1967.10. 1 입당 예배
- 1975. 5.25 헌당식 예배
공사비 개요
공사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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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 건축비
22,125,944
목 사 관
903,595
전도사관(사찰 사택포함)
931.830
비 품
1,324,505
총 공사비
25,285,874
특히 물질적인 어려움이 컸을 때 당시 동산병원장이었던 마포화열 박사가 당시 돈 150만원을 무이자로 교회 건축비에
협조해 주었고, 교회 건축이 극히 어려움에 처했을 때 변옥란 권사가 50만원을 타처에서 모금하여 왔으며, 임성길
장로의 집을 은행에 저당 설정하고 대출을 받아 건축비 지출을 한 일 등은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한다.
1975년 당시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피땀을 쏟아 헌당한 제2교회 성전은 대구시내 어느 예배당보다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김창진 목사위임(1966. 4. 3)
학습, 세례, 입교 기념(1974. 4. 14)
제직원 일동(1977. 4. 17)
제 2절 교회의 성장과 영적 부흥
1965년 1월 김창진 목사가 부임할 때는 교인수가 160여명이었다. 1975년 5월 헌당예배 당시 교인 수는 장로
12명, 권사 10명, 장립집사 7명, 서리집사 90명, 세례교인 425명으로 제이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하였다.
1982년 1월 16일 대원 6명에 곽동규 대장을 중심으로 한 바울전도대가 발족되어 전도에 심혈을 기울였고,
1982년 5월 23일 교회창립 70주년 기념예배를 가졌고 20년 이상 근속자 36명을 표창하였으며 동년 10월
25일부터 28일까지 삼덕교회의 정영환 목사를 초빙하여 청년부 주최 부흥회를 가졌다.
한편, 1985년 12월 22일 발기위원 20명을 주축으로 청년남선교회가 창립되었으며, 1987년3월 29일 총동원
주일로 신등록 21명 낮 예배 시 605명이 출석하게 되였다.
일곱 번째 이야기 - 오세호 목사의 목회
오세호 목사 위임(1993. 5.16)
77일 성경통독 새벽기도회
제1절 선교를 위한 전진
1990년 6월 김창진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한 이듬해 오세호 목사가 1991년 9월 15일 제이교회로 부임했다.
오세호 목사는 1993년 5월 16일 제이교회 위임되어 2001년 사임하기까지 10년간 제이교회에서 헌신한 분이다.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목회 철학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셨다.
첫째, 교회의 성장
둘째, 성장에 따른 외지 선교활동
제1회 예수사랑 큰잔치(1992. 5. 17)
1. 국내 선교
(1)제1회 예수사랑 큰잔치
1992년 3월 1일부터 5월 17일 창립 기념 주일까지 예수사랑 2천명 전도를 목표로 『예수사랑
큰잔치 및 1회 총력 전도대행진』이 있었다.
2,000명 전도
200명 신자화
성령의 불이 온 성도에
대구시 복음화
교회 성장 및 각 기관 활성화 ⑹ 전교인을 전도자로
제직, 구역장, 권찰을 양육자로
전교인 일치 및 협동정신 함양이었다.
한편, 총력전도 대행진을 위한 상황실 실장으로는 우영하 장로, 서기에 김해구 집사가 임명되었고, 7개 조로
편성하여 조성보, 신규찬, 서보림, 윤두석, 류해경, 이의도, 장명근 장로가 각 조장이 되어 각 조 4명씩
조원을 두어 교대로 매일 밤 7시에서 10시까지 교회로 출석하여 상황실로 운영된 1청년부실에서 전도 상황을
점검하고 독려하였다.
총력 전도를 위하여 3월 29일부터 4월 18일까지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졌으며, 부활절을 기점으로 5월
3일부터 5월 16일까지 2주간 교회를 위한 24시간 연속 기도회를 실행하는 등 ,모든 교인들이 끊이지 않고
교회와 전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각 부서 기도회, 각 기관 기도회, 각 교구 기도회를 2회
이상 가졌으며, 매일 아침 10시와 저녁 10시에 정시 기도회를 하였다. 1주간을 정하여 금식 기도회를
하였으며 매달 2번 격주로 하던 철야기도회도 계속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의 실질적 결실을 위하여 감사장을 발부하고, 초청자들을 세분화하였으며, 결신자 환영을 위한
특별한 방법을 계획하고, 특별 새신자반을 설치 운영하였으며, 구역심방을 강화하였고, 육성서신을 보내는 등
전교인의 힘과 기도를 한 곳으로 모았다.
제1회 전교인 야외 예배
(2) 제1회 전교인 야외예배
1992년 10월 11일 , 영남신학대학에서 1회 전교인 야외예배 및 야유회를 가졌다.
행사 내용은 새벽기도회와 1부 예배를 본 교회에서 드리고, 11시에 영남신학대학 강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오후 1시부터 레크레이션 지도팀을 초청하여 즐거운 한마당 놀이 행사를 가졌다. 오후에는 개인별, 부서별, 기관별 장기자랑을 하였으며 이어 저녁 예배 및 세미나를 했다.
제1회 예수사랑 큰잔치 선교바자회
(3) 사랑의 선교바자회
1993년 10월 25일 월요일부터 27일 수요일까지 매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까지 가을예수대축제 기간에 맞추어 '사랑의 선교바자회'란 주제로 교회 앞마당에서 3여전도회 주관으로 선교 바자회를 개최했다. 초청 대상은 본 교회 주변 지역주민으로 하였으며 본 교회 교우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새 상품과 중고제품을 교우들이 기증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여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좋은 호응을 얻었다.
(4) 1인 1명 새 생명찾기운동
1994년 4월 10일부터 5월22일 주일까지 '1인 1명 새생명찾기 운동'이라는 주제로 '총동원 주일'행사를 가졌다. 약 1개월 동안 준비 기간을 두고 각종 행사와 기도 모임을 갖고 전교인이 1인 1명씩 전도케 하여 교회의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5) 수기성경 쓰기운동
1994년 1월 2일 첫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전교인을 대상으로 「수기 성경 쓰기」를 실시하였다.
표준 성경은 관주 없는 개역성경으로 하고, 범위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끝 절까지 나누어 준 견본(시편1편) 형식에 따라 쓰게 하였으며 각 조별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권을 쓰게 하였다. 그 결과 수기 성경은 각조별로 구약 1권, 신약 1권씩 하여 총 1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 완필본 8권의 성경이 현재 3층 도서보관대에 보관 중이다.
새신자반 수료(1992)
(6) 제2회 예수사랑 큰잔치
1995년 4월 23일부터 5월 21일 교회 창립 83주년 기념 주일까지 5주간 동안 교회는 첫째, 내 백성을 초청하라 둘째,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전도지 셋째, 강권하여 데려오자 넷째, 온 가족 생명선에 라는 구호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수사랑큰잔치 목적은 1000명 전도 후 200명 신자화, 교회성장 및 교회기관 활성화, 전교인 일치 및 협동정신 그리고 대구시 복음화이다. 교구별 전도 결실을 보면 1교구 중 12구역이 13명, 2교구 중 2구역이 36명을, 3교구로 3구역이 38명을 전도함으로 최다를 기록하였으며, 기관별로는 3여전도회가 103명으로 최다 전도 팀이 되었다. 개인별 전도 상황을 보면 1명이상 전도자가 113명이었고, 새 신자 총 등록 수는 507명이었다.
중국 홍기보교회 헌당예배 기념(2000. 9. 21)
2. 해외 선교
1996년 6월 23일 선교주일을 계기로 하여 본교회가 해외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본교회와 가장 깊은 선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해외 선교사는 중국 선교에 힘을 쏟던 하예영 선교사, 카자흐스탄에 김택주 선교사, 본교회 출신이며 볼리비아의 코캄바에서 복음을 전하는 남계영 목사, 파라과이의 임성익 선교사 등이었다.
2000년 5월 2일 중국 선교를 위해 이의도 류해경 장로가 중국 심양을 방문하여 당회와 제직회에 선교보고를 함으로써 중국 심양에 '홍기보교회'를 개척하기로 하였다.
중국 홍기보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약 400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고 아직 그곳에는 교회가 없으므로 2000년 9월 21일 중국 심양에 홍기보 교회를 건축하여 헌당예배를 드렸다.
제1회 전교인 체육대회(경운중학교, 1989. 10. 9)
전교인 여름수련회(1996)
창립 85주년 기념 함께 뛰는 예수사랑
(동산병원 신장병환자 돕기 달리기대회, 1997. 5. 4)
비전 2020 군선교활동(2000)
비전 2020 군선교활동(2000)
- 선교 현황 -
1977년 3월 27일 상주함창 공검교회 개척을 비롯하여 1980년 11월 5일 청도 풍각제이교회를 개척하였다.
신학교와 군복음화를 위한 선교를 위해 1992년 7월 영남신학교 기숙사 건축비 50만원, 1993년 1월 영남신학교 특별보조금 100만원, 1993년 12월 장로회신학교 건축비 360만원 등이 있고, 1989년 5월 군선교 헌금 20만원, 1993년 5월 논산훈련소 합동세례식 경비 50만원 등이 있다. 특히 학원선교와 비전 2020운동을 통한 군선교에 앞장서고 있으며 현재 본교회에서 선교비를 지원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